서론: 미래 세대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착각 위에 세워져 있는가?
우리 세대가 두 가지 전 지구적 에너지·기후 정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바로 ‘보존 정책(Conservation)’과 ‘고갈 정책(Depletion)’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기적으로 고갈 정책을 선택한다면, 앞으로 30년 동안 값싼 화석연료와 희소 자원을 마음껏 소비하며 조금 더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200년 뒤 지구 생태계는 심각하게 파괴되어 2226년에 살아가는 인류는 혹독한 기후와 자원 빈곤 속에서 훨씬 낮은 삶의 질을 견뎌야 합니다(그럼에도 그들의 삶 자체는 여전히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는 나은, 즉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 $u > 0$이라고 합시다).
거의 모든 사람의 도덕적 직관은 주저 없이 ‘고갈 정책’을 규탄합니다. 이유는 명확해 보입니다. 그 선택이 미래 세대에게 심각한 해악(harm)을 끼쳐 200년 뒤의 사람들을 원래 누릴 수 있었던 삶보다 더 나쁜 상태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학교의 철학자 데릭 파핏(Derek Parfit, 1942–2017)은 1984년 불후의 명저 《이유와 인격》(Reasons and Persons) 제16장에서 윤리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날카로운 역설을 증명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고갈 정책 대신 보존 정책을 선택했더라면, 200년 뒤 ‘고갈된 세계’에서 우리를 원망하고 있는 수십억 명의 구체적인 개인들 중 단 한 명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고갈 정책이 바로 그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전제 조건이고 그들의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고갈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그들을 ‘해쳤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현대 규범윤리학과 인구윤리학 최대의 난제인 비동일성 문제(The Non-Identity Problem)입니다.
flowchart TD
DEC["Present Policy Choice (Year 2026)"] -->|"Conservation Policy"| W1["World C (Year 2226): Population P_C (Alice, Bob...) with High Well-Being u = 90"]
DEC -->|"Depletion Policy"| W2["World D (Year 2226): Completely Disjoint Population P_D (Zack, Yara...) with Low Well-Being u = 25 > 0"]
W2 --> Q{"Is Zack Made Worse Off by Depletion?"}
Q -->|"Under Conservation"| NEX["Zack Would Never Have Existed (Different Gametes Met)"]
Q -->|"Under Depletion"| EX["Zack Exists with a Life Worth Living (u = 25 > 0)"]
NEX --> PARADOX["Non-Identity Paradox: Depletion Harms No Individual, Yet Seems Gravely Wrong!"]
EX --> PARADOX
1. 시간 의존성 주장과 배우자 기원 본질주의: 왜 정책이 ‘누가 태어날지’를 바꾸는가?
거시적인 경제·환경 정책 하나가 왜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의 정체성(identity)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까요? 그 답은 생식생물학과 솔 크립키(Saul Kripke)가 《이름과 필연》에서 제시한 기원 본질주의(Origin Essentialism / 배우자 본질주의)의 결합에 있습니다. 모든 구체적인 인간 개체는 특정한 정자 하나(한 번에 배출되는 $1 ext{억} ext{–}3 ext{억}$ 개 중 하나)와 특정한 난자 하나의 수정으로부터 탄생합니다. 만약 부모가 아이를 임신하는 시점이 단 몇 분, 혹은 한 달만 달라져도 난자와 결합하는 정자는 완전히 다른 정자가 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당신과 유전자를 $50\%$ 공유하는 친형제자매일 뿐 결코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그 시간선에서 당신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파핏은 이를 시간 의존성 주장(Time-Dependence Claim)으로 정식화했습니다. “만약 어떤 특정한 사람이 실제로 잉태된 시점으로부터 한 달 이내에 잉태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은 사실상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보존 정책과 고갈 정책이 일으키는 나비효과를 추적해 봅시다. 에너지 정책이 바뀌면 당장 어떤 공장이 가동되고 어떤 기차 시간표가 편성되는지, 청년들이 어느 도시로 이주하고 어느 비 오는 저녁에 누구와 만나 결혼하는지가 바뀝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전 세계 부부들의 임신 시점이 미세하게 이동하며, 200년(약 7~8세대)이 흐른 뒤에는 고갈 세계 $w_D$에 존재하는 인구 집합 $P(w_D)$와 보존 세계 $w_C$에 존재하는 인구 집합 $P(w_C)$의 교집합은 정확히 공집합($0\%$ 일치)이 됩니다!
파핏은 ‘14세 소녀의 출산’과 ‘임신 전 검사 vs. 임신 중 치료 의료 프로그램’ 사고실험으로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다듬었습니다. 14세 소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당장 아들 빌리(Billy)를 낳기로 결정합니다. 그녀의 선택이 빌리를 더 나쁘게 만들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녀가 24세까지 기다렸다면 전혀 다른 아이가 태어났을 것이며 빌리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임신 전 풍진 검사(임신을 두 달 연기해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하는 프로그램)’를 취소하여 1,000명의 장애아가 태어났더라도, 그 1,000명 중 누구도 프로그램 취소로 인해 ‘더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임신을 두 달 미루었더라면 그 1,000명의 아이들은 애초에 잉태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text{Counterfactual Harm Condition:} \quad \text{Harm}(A, p) \iff u\big(p, w(A)\big) < u\big(p, w(\neg A)\big) $$$$ \text{Non-Identity Condition:} \quad P\big(w(\text{Depletion})\big) \cap P\big(w(\text{Conservation})\big) = \emptyset, \qquad \forall p \in P\big(w(\text{Depletion})\big),\; u(p) > 0 $$2. 비동일성 문제의 형식적 구조: 양립 불가능한 삼중 명제(Inconsistent Triad)
비동일성 문제가 철학적으로 그토록 파괴적인 이유는 우리가 가장 굳게 믿는 세 가지 도덕적 전제가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양립 불가능한 삼중 명제(Inconsistent Triad)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 전제 P1: 인간 영향 원리(Person-Affecting Principle / 나브슨의 표어): 얀 나브슨(Jan Narveson)의 유명한 말처럼 “도덕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지,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에 관심이 있지 않다.” 파핏의 표현을 빌리면 “나쁜 것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나쁜 것이어야 한다(What is bad must be bad for someone).”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르려면 반드시 그 행위로 인해 더 나빠지거나 해를 입는 특정 개인 $p$가 존재해야 합니다.
- 전제 P2: 해악의 반사실적 비교 정의(Counterfactual Comparative Harm) + 비동일성 사실: 행위 $A$가 개인 $p$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은 $A$가 일어났을 때 $p$의 복지가 $A$가 일어나지 않았을 반사실적 세계에서의 $p$의 복지보다 낮다는 뜻입니다($u(p, w(A)) < u(p, w( eg A))$). 그러나 고갈 정책 하에서 2226년에 태어난 어떤 개인 $p \in P(w_D)$에게도 유일한 반사실적 대안은 ‘비존재’뿐이며,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u > 0$)은 비존재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갈 정책으로 인해 해를 입거나 더 나빠진 개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 전제 P3: 고갈 정책의 도덕적 부당성(및 ‘무차별 견해’ No-Difference View): 고갈 정책을 선택하는 것(또는 임신 전 검사 프로그램을 취소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그른 행위이며, 이미 잉태된 태아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것과 도덕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P_1$과 $P_2$를 동시에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 eg P_3$가 도출됩니다!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구출하려면 세 전제 중 적어도 하나를 포기하거나 수정해야만 합니다.
flowchart TD
TRIAD["The Non-Identity Inconsistent Triad"] --> P1["P1: Person-Affecting Principle (Wrong only if someone is made worse off)"]
TRIAD --> P2["P2: Comparative Harm + Gamete Origin Essentialism (No one in World D is worse off)"]
TRIAD --> P3["P3: Moral Intuition (Choosing Depletion is morally wrong)"]
P1 -->|"Reject P1"| S1["Impersonal / Total Utilitarianism & Parfit's Principle Q"]
P2 -->|"Reject Comparative Harm"| S2["Threshold Harm & Rights-Based Accounts (Harman, Shiffrin, Meyer)"]
P2 -->|"Distinguish De Dicto vs. De Re"| S3["Role-Based Contractualism (Hare, Kumar)"]
P3 -->|"Reject P3 (Bite the Bullet)"| S4["Radical Person-Affecting Acceptance (David Boonin)"]
3. 5대 철학적 탈출구와 기후 경제학·CRISPR 유전자 편집의 현실적 쟁점
지난 40년간 윤리학자들은 비동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섯 가지 주요 전략을 발전시켰습니다.
- 전략 1(P1 포기): 비인격적 윤리학과 파핏의 ‘동수 질적 주장 $Q$(Principle Q)’: 파핏은 좁은 ‘인간 영향 원리’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가능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수가 같다면, 설령 구체적으로 누가 태어나는지가 달라지더라도 전반적인 삶의 질이 더 낮은 세계가 도덕적으로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구 규모가 달라지는 일반적 상황(파핏이 찾아 헤맨 ‘이론 X’)으로 확장하면 ‘역겨운 결론(Repugnant Conclusion)’(제17편 참조)이라는 또 다른 늪에 빠집니다.
- 전략 2(P2a 수정): 임계치 해악(Threshold Harm)과 비비교적 권리 침해(Meyer, Harman, Shiffrin): 루카스 마이어(Lukas Meyer)와 엘리자베스 하먼(Elizabeth Harman)은 해악이 반드시 반사실적 상태와의 비교를 요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누군가를 인간 존엄성의 최소 임계치 $u_{ ext{thresh}}$ 이하의 고통스러운 상태로 태어나게 만들었다면 비록 다른 대안이 없었더라도 권리 침해이자 해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고갈 정책이 미래 세대의 삶을 ‘지극한 번영($u=95$)’에서 ‘임계치 이상의 그저 그런 삶($u=50 > u_{ ext{thresh}}$)’으로 떨어뜨리는 경우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판정하는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 전략 3(P2b 수정): 대언적(De Dicto) 의무 vs. 대물적(De Re) 의무와 계약주의(Caspar Hare, Rahul Kumar): 부모나 현세대의 도덕적 의무는 특정한 유전적 개체(De Re)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녀’ 혹은 ‘미래 시민’이라는 규범적 지위/역할(Office / De Dicto)에 대해 지는 것이라는 해법입니다.
- 전략 4: 덕 윤리학과 집단 중심 관점(Hursthouse): 고갈 정책은 현세대의 탐욕과 무책임이라는 악덕을 드러내므로 그르다고 봅니다.
- 전략 5(P3 포기): 총알 깨물기(Biting the Bullet, 데이비드 부닌 David Boonin 2014): 부닌은 위 모든 대안이 실패한다고 논증하며, 미래 세대의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 한 고갈 정책이나 14세 출산은 도덕적으로 전혀 그르지 않다는 반직관적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비동일성 문제는 세 가지 현실 정책의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1) 기후변화 경제학의 사회적 할인율(Social Discount Rate $r = \delta + \eta g$)(노드하우스와 스턴 보고서 사이의 순수 시간선호율 $\delta$ 논쟁); (2) 생식 생명윤리(단일 배아의 유전자를 교정하는 CRISPR는 동일 개체 치료인 반면, 착상 전 유전진단 PGD로 다른 배아를 선택하는 것은 비동일성 대체임); (3) 역사적 부정의와 배상 책임(과거의 식민 지배나 노예제가 없었더라면 현재의 후손들이 태어나지 않았을지라도, 국가가 매 세대 태어난 시민들에게 정의로운 재분배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은 반사실적 비교와 무관한 현재진행형 불법행위임).
| 해결 전략 / 대표 학자 | 포기·수정하는 전제 | 핵심 이론적 메커니즘 | ‘임계치 이상의 고갈 정책’ 규탄 가능 여부 | 주요 이론적 대가 및 한계 |
|---|---|---|---|---|
| 비인격적 원리 $Q$ / 공리주의 (Parfit 1984) | P1 포기 (인간 영향 원리) | 서로 다른 가능세계의 총체적 복지 수준 비교 | 가능 ($u=90 \succ u=50$) | 인구수가 변할 때 ‘역겨운 결론’으로 이어짐 |
| 임계치 해악 및 권리론 (Meyer, Harman) | P2 수정 (반사실적 비교 해악) | 최소 존엄성 임계치 $u_{ ext{thresh}}$ 미달 시 해악 성립 | 불가능 ($u=50 > u_{ ext{thresh}}$이면 면책) | 높은 복지 구간 내에서의 환경 파괴 책임을 설명 못 함 |
| 대언적(De Dicto) 계약주의 (Hare, Kumar) | P2 수정 (지시 대상의 성격) | 도덕적 의무는 ‘미래 시민/자녀’라는 역할(Office)에 귀속 | 가능 (역할에 대한 정당한 기대 침해) | 왜 도덕적 지위가 구체적 인간이 아닌 언어적 역할에 붙는가? |
| 덕 윤리학 (Hursthouse) | P1 포기 (결과 중심주의) | 행위자의 성품(탐욕, 근시안 vs. 배려) 평가 | 가능 | 잘못의 초점이 미래 피해자가 아닌 ‘현세대의 인격’으로 이동 |
| 급진적 수용론 (David Boonin 2014) | P3 포기 (도덕적 직관) | 고갈 정책과 임신 전 미검사가 도덕적으로 허용됨을 인정 | 해당 없음 (잘못임을 부정) | 기후 정의 및 공중보건에 관한 인류의 보편적 직관과 정면충돌 |
